숨겨진 그림자 전쟁. 캄보디아 1차 킬링필드
이번에 폴폿의 화장터를 다녀오고 난 후 예전부터 쓰고 싶던 이야기를 써볼까 한다. 냉전시절에는 우리는 미국이 주는 정보만 그대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캄보디아의 가장 슬픈 이야기,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추악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 본다. 이 이야기를 결코 크메르 루즈가 벌린 학살을 변호하거나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크메르 루즈군의 최대 후원자이자 추악한 전쟁을 벌인 이들의 숨겨진 그림자 전쟁 이야기다.
루즈가 벌린 학살을 변호하거나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크메르 루즈군의 최대 후원자이자 추악한 전쟁을 벌인 이들의 숨겨진 그림자 전쟁 이야기다
1차 킬링필드와 2차 킬링필드
캄보디아에는 1차 킬링필드(1968-1974)와 2차 킬링필드(1975-1978)가 있었다. 우리는 2차 킬링필드만 이야기를 한다. 1차가 없었다면 2차 킬링필드가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은 1차 킬링필드에 대한 이야기와 2차 킬링필드로 나눠서 하고자 한다.
영화 킬링필드
캄보디아를 기억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 번째가 앙코르 유적이고 그 다음은 킬링필드 이야기다. 킬링필드가 뭘까?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는 정확하게 롤랑조페 (Roland Joffe)라는 영국인 감독이 1984년 만든 영화 이름이다.
그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1973년 8월 7일, 캄보디아(Cambodia)주재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 특파원인 시드니 쉔버그(Sydney Schanberg: 샘 워터스톤 분)는 1972년 캄보디아 사태에서 크메르군을 섬멸하기 위해 미국 공군이 프놈펜 외곽도시인 닉룸에 잘못 폭격하여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1973년 8월 현지 취재차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도착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알려질까 봐 보도진을 따돌리려 하고 시드니는 뉴욕 타임스지 현지 채용 기자인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Dith Pran: 행 S. 응고르 분)과 함께 어렵게 현지에 가서 참혹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프놈펜이 함락된 1975년 4월 그는 캄보디아를 탈출하고 현지 조수 디스 프란은 수용소에 있다 탈출하여 미국으로 간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당시 크메르 루즈군의 잔혹상. 학살 등에 대해 슬퍼하고 경악해 한다. 그런데 미국이 왜 캄보디아에 폭격을 했는지는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왜냐면 미국이 캄보디아에 폭격을 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소위 베트남전쟁(1964-1975)과 깊은 연관이 있다
베트남은
베트남은 어떤 나라인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쪽에 바다를 접하고 있으며 중국 남쪽에 있는 나라다. 지금은 하나의 나라지만 역사가 상당히 복잡한 나라다.
남쪽은 앙코르 왕조가 오래 지배 했고 실제 크메르족이 상당수 살고 있으며 중부는 인도네시아계의 참파 왕국(베트남어: Chăm Pa, 192년 - 1832년)이 있었다. 북부지역은 중국계인 월족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던 1350년 월나라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참파의 왕궁인 다낭을 함락시킨다. 그러면서 참파는 밑으로 내려가게 되고 월나라의 세력이 점점 커진다.
산업혁명의 바람이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는 식민지로 전락했고 베트남도 1862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
2차 세계대전(1939-1945)는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1940년 5월 독일은 프랑스를 침략하게 되고 5주만에 프랑스를 함락하게 된다. 정전협상을 통해 60%정도는 독일이 직접 통치 하고 남쪽 휴양도시인 비시 라는 곳에 친독일 괴뢰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이에 반발한 드골을 영국에서 자유프랑스라는 망명정부를 만들어 프랑스에서 저항하던 레지스탕스와 협력하면서 독일군에 저항 했다. 그러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독일군을 몰아내고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된다.
독일군을 몰아내고 프랑스 사람들은 부역자 처벌을 위한 약식 재판을 통해. 혹은 마을에서 임의로 독일군에 협력했던 부역자, 독일군을 애인으로 뒀던 사람을 돌로 때려죽이거나 머리를 밀게 하거나 옷을 모두 벗기고 길거리 행진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돌로 때려죽이거나 불로 태워 죽인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의 숫자는 최소 12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12만명이상을 정식 재판에 회부 시키고 약 1500명을 사형 시키고 5만명이 넘는 사람을 공민권을 박탈 시켰다. 그리고 특히 언론에 대해서 중형을 내렸다. 이런 프랑스의 2차 대전의 불똥은 인도차이나 반도로 떨어진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주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던 프랑스의 비시정권은 독일군의 연합국인 일본에 식민지 관리권을 위임하게 되고 이들 나라에 1941년부터 일본군이 주둔하게 된다. 1945년 일본군이 패망하면서 베트남의 남부쪽은 영국군이 북부쪽은 중국군이 일본군 무장 해제 시키고 군대가 주둔하게 된다. 2차 대전 종전 후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하는데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도 독립을 시도 하지만 프랑스는 군대를 이용하여 억압한다. 끝내 호치민이 조직한 월맹군 중심으로 항불 독립전쟁(1946-1954)이 일어난다. 1949년 집권에 성공한 중국 공산당의 지원으로 세력이 커지자 미국을 중심으로 베트남에 주둔하는 프랑스 군대를 지원하게 된다.
한국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한 다음해 1954년 5월 마침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면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다.
제네바 협정
1953년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한 미국이 깜짝 놀라게 된다. 소위 도미노현상(한나라가 공산화가 되면 인접 나라도 공산화가 되는 현상)을 우려하던 미국은 UN을 중심으로 프랑스.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5대 강국이 모여서 제네바 협정을 체결한다.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라를 경영할 능력이 없으니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부는 미국이 북부는 소련이 2년간 신탁 통치 후 1956년 7월 통일국가를 수립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베트남이 국가를 경영할 능력이 없었을까? 그들은 독립전쟁을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고 전쟁와중에도 5만명의 젊은이를 중국, 소련, 북한, 동유럽 등으로 유학을 보냈다. 호치민은 전쟁에 승리 했지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제네바협정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500만의 사상자가 생기는 베트남의 비극은 시작 된다.
베트남의 분단
호치민의 인기로 공산화를 두려워했던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공산주의자 응오딘지엠이 권력을 장악하고 제네바 협정을 거부하면서 1955년 일방적인 남베트남 선거를 해 버렸고 북베트남은 협정대로 1956년 7월 선거를 통해 호치민이 수상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면서 남베트남의 사회주의 정당조직인 베트민(Viet Minh)과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Vietnamese National Liberation Front:NLF)은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와 국지전으로 인해 미국의 지원이 없으면 다음날이라도 무너질 정권이었다.
베트남전
그러던 1964년 8월 7일 미국은 북베트남 해군 요충지인 통킹만을 폭격하면서 소위 베트남 전쟁(베트남명 항미전)이 시작 된다. 그 전쟁은 북 베트남의 월맹군과 남베트남의 월남군. 그리고 남부의 자생적 사회주의 조직인 베트민과 베트콩의 전쟁으로 내전이라 봐야 하지만 미국, 유럽, 한국 중심의 월남군 지원, 중국, 소련, 북한 중심의 월맹군 지원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500만명이상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이 되었다. 전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베트콩의 게릴라전으로 남베트남 지역은 후방과 전방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 되었다. 여기서 캄보디아의 그림자 전쟁이 시작 된다.
호치민 루트
중국, 소련, 북한 중심의 지원을 받은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있는 베트콩과 베트민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의 공습을 피해 라오스. 캄보디아로 들어와서 다시 베트남으로 들어가는 루트를 개척한다. 그 루트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미국에 알려지고 백악관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그 루트를 `호치민루트`라고 명명한다. 이 전쟁의 승패는 호치민 루트의 봉쇄에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그 루트에 1968년부터 폭격을 시작 한다. 처음에는 23-04시까지만 폭격을 하고 3km 이내에 민가가 있으면 폭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악화되자 그 원칙은 없어지고 북 베트남군대가 있다고 판단되면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폭격하게 된다. 심지어는 결혼식장도 폭격했다.
캄보디아 독립
1945년 일본이 패망에 가까워지자 관리하던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을 독립국 선포를 하게 하지만 프랑스가 점령하여 식민지 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다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불 독립전쟁에서 불리해지자 1954년 독립을 시킨다. 캄보디아는 독립 이후 입헌 군주제를 채택했고 국왕이었던 노로돔 시하누크빌 국왕은 영세 중립국을 선포 했지만 약소국의 입장으로 영세중립국의 유지가 힘들었다. 밀림이 많은 동남아 특성상 국경에 대한 통제와 규제가 힘들었고 한때 약 4만명의 북베트남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또한 북 베트남 군대를 섬멸하기 위한 폭격과 미군의 진격 또한 있었지만 캄보디아는 제제 할 힘이 없었다.
쿠데타
캄보디아는 미국의 폭격으로 문제가 생기자 UN 등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자국 영토 폭격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등 여론전을 펼치게 되고 미국은 수차례의 변명과 사과를 거듭하다 끝내 1970년 3월18일, CIA의 사주를 받은 론놀 국방부 장관은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고 해외순방 길에 있던 국왕은 중국에 임시정부를 만들게 된다. 당시 왕당파는 친미 정권에 협력 하거나 중국으로 망명을 가기도 했다. 소수정당이던 크메르 루즈군은 대정부 게릴라 투쟁에 들어갔으며 시하누크빌 국왕과 협력을 하게 된다.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
가장 껄끄럽던 시하누크빌 국왕이 없어지자 미국은 마음껏 폭격을 하게 된다.
심지어 1970년 4월 30일 만오천명의 미군, 오천명의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의 라타나끼리. 몬돌끼리 지역을 진격해 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캄보디아를 침공한 것이 아니라 캄보디아에 미국인을 보호하고 월맹군을 잡으러 간 것이다. 라는 궤변을 미 국무부는 발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대학의 3분의 1이 휴학할 정도로 극렬한 반전 시위의 확산으로 캄보디아에 진격한 미군은 6월 30일 철수 한다. 철수는 했지만 폭격은 계속 되었다.
미국의 폭격
그들이 얼마나 많은 폭격을 했는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는 16만톤의 폭탄을 투하 했다. 미국은 약 4배인 64만톤의 폭탄을 캄보디아에 투하한 것으로 추정 한다. 바로 캄보디아에 있다고 추정하는 북베트남 군대를 잡기 위해서다. 폭탄의 규모도 북베트남군의 규모도 오로지 추정, 추정할 뿐이다.
그 폭격을 통해 농업국가인 캄보디아 농토의 80%가 파괴되고 쌀 수확량은 90%줄어들면서 쌀 수출을 하던 농업국가가 쌀 수입을 해야 하는 극빈국으로 전락한다.
프놈펜 점령
농지가 파괴된 그곳은 크메르 루즈군이 점령하기 시작한다.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총을 들기 시작했다. 1973년 평화 협정으로 미군은 철수를 시작 했고 남베트남이 위기에 처해질 때 캄보디아 정부군도 위기를 맞이한다. 끝내 1975년 4월 15일 미국대사관은 철수를 하고 4월 17일 크메르 루즈군이 프놈펜에 진격해 온다. 정부군 23만명이 7만명의 크메르 루즈군에게 패배 했다. 그 농락을 벌인 론놀은 하와이로 망명을 간다. 그리고 1985년 늙어서 미국에서 죽었다.
CIA비밀문건
200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나자 CIA의 비밀문서는 미 의회에 공개 된다. 그런데 CIA의 보고서에 캄보디아는 단 한 장으로 끝난다.
호치민 루트의 분쇄를 위해 미국의 폭격으로 사망자가 있었으며 70만에서 80만으로 추정한다. 가 끝이다.
얼마나 많은 폭격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고엽제. 쏘이팜탄이 떨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폭격으로 인한 피해규모는 파악되지 않으며 폭격의 규모도 추정할 뿐이다. 부상자 숫자도 없고 사망자 숫자만 70-80만으로 추정 한다. 가 현재 밝혀진 규모다.
사진은 구글에서 다운 받았으며 2부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