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잠자리
물고랑을 열어 놓았다. 쏴아 낙차 큰 배수로에 물 떨어진다. 떨어지는 물 그늘 아래 하늘하늘 여린 움직임. 뭘까. 아― 낙차공 밑 고인 물속에서 밤새 올라온 잠자리 유충이 번데기에서 우화(羽化)해 비상하려는 중이다. 이런! 절대 절명의 순간 인간인 내가 나타나 물벼락을 쏟는구나. 그렇다고 논 말리기를 포기할 수 없는 노릇. 내 아내 내 아들 내 어머니 내 가족을 한쪽, 잠자리를 다른 한쪽, 저울 달아본다. 돌아섰다. 잊었다. 며칠 지나 논물을 대려 배수구를 막으며 낙차공을 내려다본다. 이 재수 없고 불길한 구조물 속에 또 다른 고추잠자리가 우화(羽化)를 마쳤다. 살며시 날개 만져본다. 놀란 고추잠자리 날아오른다. 새벽 햇빛 눈부시다. 와아― 쏟아져 비상하는 수천 고추잠자리의 군무. 하늘 빨갛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