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독을 가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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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독을 가시면서

유토피아. 2 472

김장독을 가신다.

어두컴컴한 장광 땅 밑 김칫독을 꺼내 수돗가에 세워놓고 물 두어 바가지 좍좍 쏟아 붓고 캄캄한 독 안을 들여다보니 찰랑이는 물결 속 한 줄기 빛이 마주 쏘아보고 있다.

가신 물 퍼내려 독을 기울이니 찰랑이는 해 하나 떴다.

아가, 너 왜 거기 있니.

대답 없는 아기는 수십 년 전에 죽은 누이의 얼굴이 되었다가, 고모가 되고,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할수록 기약 없이 변모하는 수천의 얼굴들.

얼굴들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쏴아 ―” 시원(始原)의 첫 발성음(發聲音)이다.

“당신 뭐해요.” 아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사라지는 얼굴.

언제나 슬프고, 늙어버린 마지막 얼굴로 남았던 얼굴들이 왜 김장독 속에선 그렇게 젊은 나이로 활짝 웃고 있는지.

젊어진 얼굴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말(言語)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 빅뱅(Big Bang)까지 거슬러 올랐다가 빛의 속도를 빌려 잠깐 다녀간 것은 아닌지.

아니면 내가, 아내가 순간순간 또 다른 시간에서 새로운 시간으로 사라졌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닌지.

2 Comments
브랜든_Talog 2007.05.18 17:33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티벳의 샹그릴라도 아니고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거죠? ^^;
동차이 2007.05.18 18:48  
  제가 김장독 가실때는 아무 것도 안보이던데...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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