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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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모

마지막 악수

유토피아. 2 661

“사왓디 클랍(안녕하세요).”


태국어를 배운지 3개월. 태국에서 태국 말 배워 태국 사람들에게 한국말 가르치려던 계획을 접었다. 따라서 내겐 태국어가 사어(死語)로 변했다.


사어가 된 태국어를 뒤적인다.


“사바디 클랍 컵쿤, 쿤라 클랍(좋습니다. 당신은 어떠세요).” 석 달이 되도록 입 안에서 뱅뱅 맴돌 뿐 선뜻 나와 주지 않을 뿐 더러 그 질문에 대한 답 “사바디 클랍 컵쿤”이란 아주 기초적이고 쉬운 답조차 까맣게 잊고 멍한 입만 벌리기 일 수다.


태국어. 왜 자리 내어주길 그렇게 거부 했을까.


후진국 언어라 깔본 내가 미웠던 걸까. 아니면 머리 하나 자신하고 대어든 내 머리를 깨어 부수고 싶었던 걸까. 하여튼 지긋지긋하도록 미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건방을 떨기 시작한다.


아유타야에선 등허리 긁개에 니스 칠하는 여자를 젊은 화가로 착각하고 들어갔다가 “이거 피셋(특별히)해서리 싸게 파는 겁니다”하는 바람에 (피셋이란 말이 어제 막 배운 말이라 반가와)필요도 없는 긁개 10개를 사기도 했고,


‘땀루악’이란 단어가 이해가 안 돼, 경비실 직원들과 한참 악다구니 하다가 신문철을 들고 와 경찰 사진을 들이대는 바람에, 아 그렇구나, 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다. ‘낙테.’ 장래 큰 아들의 직업이 될 것이며 매주 교회에서 만나고 설교를 듣는 목사님이란 단어를 배우자고 경비원과 한참을 입씨름하다


경비원도 지쳤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나가는 젊은 신혼부부를 ‘낙테’라 가르쳐 주는 것을 곧이듣지 않고 돌아왔다가 5,000밧이나 하는 핸드폰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달려갔지만 오리발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내 더러워 태국 말 안배우면 안 배웠지 저 자식들하곤 말도 안한다고 돌아섰는데, 이 자식 나만 보면 “사왔디 캄. 캄.” 침 튀기며 인사하며 쫓아다니는데 지겨워 죽을 맛이다.


장소불문, 남녀노소막론, 직위고하무관하게 자기 자랑에 목말라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 말 한 마디를 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외국인이니까 영어로 대어들고 나는 나대로 태국말로만 쏼라 거리니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지 하겠건만 오히려 보는 사람들마다 부럽다는 표정이니. 그게 하루에도 열 번을 실히 되다보니 내 태국어 실력도 보통은 아닌 거다.

수코타이에선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돌아다니다, 목이 말라 구멍가게에서 물을 사먹는데 “Where are you going”하며 맥주 한 잔을 따라주는 데 차디찬 맥주 목을 타고 넘는 맛이 기가 막힌 거다.


그 걸 마시며 얼결에 나온 말이 “폼 마 쁘라테 까오리 무앙 여주(한국 여주에서 왔다).” 이거 봐. 너는 영어만 알지. 나는 너희 나라말까지도 알잖아. 하고 빙긋 웃어 보이는 데, 이 친구 슬며시 자리를 뜬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 무식이 빵꾸가 난거다.


‘소깝쁘로.’ 방콕 중심가를 끼고 흐르는 짜오쁘라야 강과 그 지류 ― 운하는 동양의 베니스라는 말이 나옴직한 명물로 아침저녁이면 도시의 동맥이 되어 힘찬 파도가 친다.


배 한 대면 충분히 100여명이 탄다. 방콕의 교통 혼잡은 세계적이라. 교통지옥으로 버스나 택시 안에서 장시간 허덕일 때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이 운하의 배다. 그 운임이 얼마나 싼지. 돈을 내는 내가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 운하의 더러움은 소까쁘로의 극치다. 우리나라 청계천 최악의 2, 3배는 충분히 능가할 더러운 물이 뱃전에서 출렁이는 거다. 이 운하의 소까쁘로가 해결되는 날, 헐값으로 거래되는 태국은 천정부지로 뛰어 올라 나 같이 겁도 없이 출입하는 외국인이 엄청나게 줄어들 거다.


태국어 공부 방법은 각각의 패턴을 놓고 수많은 시추에이션을 설정해 각자 마음대로 패러디 하는 거다.


웰라 , 쿤 루숙 양아이 클랍( 할 경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지막 시간에 묻는 질문이다. 내 차례다. 거침없이 답이 나왔다.


태국에 처음 왔을 때 별 볼일 없는 후진국으로 생각했다. 다시 생각한다. 방콕은 21세기와 19세기가 혼재한다.


외국인 2, 300명이 족히 살고 있는 아파트에 ‘뉴스 페이퍼’가 뭔지 모르는 녀석이 경비를 서는가 하면, 버스 차장, 초등학교 어린이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시내버스가 개문 발차하며, 삼륜차, 오토바이가 차선을 마구잡이로 넘나들고, 지하철 지상철이 미끄러지듯 달리며, 장거리 여행버스는 에어컨을 최대한으로 가동해 손님 바짝 얼쿼 죽일 작정인지.


춥다면 에어컨을 끄는 게 아니라 담요를 덮어주는 이 친절은 비행기 스튜어디스에게서 배운 것인지 마음껏 사치를 부려보자는 심사인지.


천둥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정전이 되고 정전이면 거대 아파트도 자가 발전은 어림도 없는 곳, 그러나 더 몰, 빅 씨, 아웃렛이 버젓이 첨단의 세기를 앞지른다. 방콕은 살아 꿈틀거리는 거대 공룡의 도시.


태국어 다시 차근차근 뒤적인다.


도대체 이 별 볼 일없는 원시언어. 삼인칭이면 무조건 ‘카우’ 한 단어로 해결되는 언어. 이게 왜 내 속을 그리도 썩였을까.


남들은 한 달이면 거뜬히 뛰어 넘는 과정을 내게 두 달을 강요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 강의를 듣다보면 저게 태국언지 영언지 가물가물할 때가 태반이고, 강사의 설명 중 한마디만 헷갈려도 한 시간은 족히 죽을 쑤곤 한다.


이래선 안 되지. 마음 독하게 먹고 읽던 소설 책 몽땅 벽장 속에 가둬두고, 쓰던 수필 꺾어 책상 밑바닥에 던져놓고 오로지 태국어만 읽는다.


서서 읽고, 앉아서 읽고, 걸어가면서 읽고, 수영하다 읽고, 자다가 깨면 읽고, 읽다가 졸리면 자고, 자다 깨면 다시 읽는다.


그렇게 읽은 날은 어김없이 표가 난다. 선생의 말이 또박또박 들리고, 나의 답이 한 치 오차 없이 산뜻 하다.


수업은 질문과 답이다. “눈 오는 날 산책을 하며 당신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이 뜨거운 열사의 나라에서 갑작스런 내 질문을 받은 프랑스 여인이 마냥 신이 나, 잊었던 옛 애인 이름까지 들춰내고 교실 안은 온통 첫 눈 내리던 날의 시계 바늘로 돌려놓았다.


삼 개월 전, 이 땅에서 버스는 물론 택시조차 혼자 탈수 가 없었던 나다.


아유타야, 수코타이 겁도 없이 그 머나먼 곳을 혈혈단신 뛰어 다니며 아무나 붙잡고 유티나이 클랍( 어디 있지요), 타우라이 클랍( 얼마지요). 여행을 하면서 잠을 자면서 밥을 먹으면서 자전거 오토바이를 타면서 언제나 들고 다닌 언어.


그러나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성조 ― 오성. 원시 언어라고 폄하한 내가 무식해도 한참 무식한 거다. ‘카우’ 이 한 개의 단어에 오성(五聲)을 붙이면 10개의 단어로 확장된다는 걸 간과한 거다.


성조가 붙은 언어. 음악언어. …이 아름다운 언어 앞에 미련을 남겨도 때는 늦었다.


이제 손을 뗄 차례. 마지막 악수. 피카소의 연인같은 여자를 만난다해도 이런 사랑 다시는 못하리.

2 Comments
풍류 2007.06.20 00:27  
  저도 요즘 태국어 배우고 있습니다. 폼 리안 파싸 타이~ 헐.. 제가 저희 클래스에서 제일 지진아 입니다.. 그래도 두렵지 않습니다. 무식해서 무식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까요. ^^ 글 참 맛있습니다!!
브랜든_Talog 2007.06.20 13:02  
  학창시절 존경하던 교수님에게 "이거 재미있네" 라는 칭찬 한마디 들으려고(?) 남들 동아리다 축제다 흥청망청 할 때, 설계실에 불켜놓고 밤을 지세웠던 건축학도 였었지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유토피아님 글은 '재미'가 있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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