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자화상
인터넷 수리를 했다. 기사가 방문해 2, 30분 동안 자기 노트북과 내 컴퓨터를 접속해 마우스와 자판기를 뚜덕이더니 수리비 350바트(태국 화폐단위)를 내어 놓으란다.
돈을 주고 영수증을 달라니 급히 밖으로 뛰어 나가더니 한참 후에 들어와 돈을 도로 내어 놓으며 안 받는 것을 받았다고 미안해하며 나가는데, 몇 번씩 뒤돌아보는 꼴이 시원찮다.
다음날 정수기 수리를 하고 기사에게 수고비로 별도의 돈을 주는 걸 보고 알았다. 몇 푼 집어 주는 것이 관행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나라 의식수준이 아직 멀었다는 것도.
학원에서 태국어를 배우는 데 과일 이름이 나왔다. 바나나, 파인애플, 두리완, 뗑모…. 뗑모는 워터 메론 ― 수박이다. 수박이 나오니 강사의 말이 길어졌다. 빨강물감과 설탕을 주사해 설익은 수박을 잘 익은 수박으로 둔갑시켜 상술은 더러워 졌고, 자연은 사악한 쪽으로 이용당한다며 부끄러워한다.
방콕은 운하(運河)의 도시로 동양의 베네치아란 말이 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생활하수, 공공연히 방류되는 공장 폐수로 물은 엉망진창이다. 쓰레기 분리수거도 하지 않아 아파트에 살면서 쓰레기 버리는 일만큼은 국내 보다 훨씬 편한 곳이 이 곳이다.
한국인들이 말한다. 여기 비하면 우리 나라는 선진국입니다.
그러나 1, 20여년 지났을까. 팀스피리트로 피해 조사 나온 미국인이 하천에 무작위로 버려진 쓰레기 더미를 바라보며 껄껄껄 웃는 걸 보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그 팀스피리트 피해 보상으로 3, 4년 농사를 웃도는 돈이 나왔으니 일확천금을 버는 횡재를 만나는 장사다. 그 것도 농사꾼들이 터득한 게 아니다. 전쟁 연습장을 빌려준 대가이니 얼마든지 받아먹으라고 사주한 지식인. 피해 조사를 나왔던 상급기관의 은근한 부추김.
그러나 공짜 날름 받아먹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뼈아팠는지. 아직도 이웃간에 원한의 골이 깊고, 집안 간에 말 끊고 살기도 한다.
그래도 태국을 비웃거나 얕잡아 보는 한국인이 없어 다행이다. “과정인 것 같아요. 우리 나라도 그랬잖아요. 오히려 더 심했지요. 태국도 얼마 안 있으면 좋아 질 거예요.”
내부 의식과 외부 환경. 그 것이 따로 노는 게 아니다. 외부환경이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는 날 내부의식이 상향조정되고 내부 의식이 눈금 하나 올라가는 날 외부 환경의 폭이 넓어지는 모양이다.
20여 년 전 어느 전자제품 회사 TV 광고에서 물 한잔만 달라는 수리공의 밝은 웃음이 의식구조를 한꺼번에 뜯어 고친 적이 있다. 그 광고 나간 후 돈을 달라거나 은근히 금품을 강요하던 기술자가 없어졌다. 광고가 수입원을 잘라 생활을 궁핍하게 한 게 아니라 기술자 자존심을 극대화 시켜 확실한 인간 대열에 귀속 시킨 거다.
붉은 물감이나 설탕 주사한 수박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과정일 뿐이에요. 우리들도 시들지 말라고 독극물에 채소를 담갔다 시장에 내다 판적이 있고, 도살용 한우를 두들겨 패 물먹인 일이며, 생선 내장에 납덩이를 집어넣기도 했으니까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곳곳에서 들어나는 방콕 거리를 거닐며 생각한다. 폐업으로 한산해진 조국의 도심지, 수석 졸업자가 재편입하는 한국의 대학, 경제가 망가져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대한민국, 대통령 욕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korean.
그래도 태국은 살기 좋은 나라라고 사방에서 모여 드는데, 조국은 못살겠다고 너도 나도 떠날 궁리만 하니 무슨 조화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