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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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모

핏줄

유토피아. 3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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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안녕하세요.” 한창 말을 배우는 꼬마의 목소리다. “안녕, 그래 너 한국 아기로구나.” 꼬마보다 애 엄마가 신기해하며 웃는다.


태국에 온지 2달 째. 태국엔 한국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러나 맞닥뜨려도 아는 체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럴까.


유추해석 한다. 통성명하고 알아 봤자 자기보다 잘 살거나 똑똑한 사람일 경우 소외감이나 박탈감으로 인한 낭패감, 자기보다 못할 경우 도와 달라 치근덕거림의 성가심. 이래저래 아니 봄만 못해 아예 처음부터 모른 체 하는 것은 아닌지.


작년 봄, 대 고모님이 돌아가셔서 오랜만에 동생들과 술자리에 모였다. 대화는 단연 잘나가는 사업가들의 몫이다.


우유 대리점과 문방구 총판점이 흉금을 털어 놓는데 한국 사람들 ‘먹고 떨어지는 데’ 대안이 없다는 거다.


이웃 일본만 해도 이사를 가거나 사업을 정리할 양이면 채권자들을 불러 한 치 오차 없이 깨끗이 정리하고 떠난다는데 이 ‘한국 종자들은 외상이면 값이 고하간에 일단 먹고 보고, 계산할라치면 어느 틈에 날라 버리는 게 다반사’라는 거다.


자기들도 한국인이지만 참으로 고약한 종자라고 성토하는 주먹이 부르르 떤다. 도대체 유, 불, 선, 도교에 기독교까지 동네마다 건물마다 선(善)을 강조하는 나라 백성들이 의리조차 잃어버린 고약한 변종이 된 연유가 뭘까.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이처럼 순수하고 여리 디 여린 민족이 왜 이리된 걸까. 왜놈의 등살에 못 견뎌 북간도에도 가고. 왜 놈의 총 칼 들고 남양군도에도 가던 날. 그리고 3. 8선 금 그어 놓고 대리전쟁 치르던 날들, 그 와중에 이 모양 이 꼴 된 게 아닌지. 그 때 뭐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 된 거다. 조상의 묘가 잘 못 들어도 한 참 잘못 든 거다.


같은 종족끼리도 피해를 못 줘 안달이니 머나먼 이국땅에서 뚝 떨어져 못 본체 돌아선 게 다행이다. 이 판국에 2살 어린애에게 한국사람, 조선사람, 요렇게 조렇게 표정과 말소리며, 숨소리, 땀 냄새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한 눈에 척 알아보는 건 도대체 뭘까.


단군할아버지로 시작된 핏줄. 대대로 내려온 그 핏줄이 이 아기와 나 사이에 팽팽하게 견인되고 있었더란 말인가. 그 긴장의 팽팽한 핏줄, 어느 한 자락 내가 나타나자마자 가을들판에서 참새 떼 쫓던 새 줄의 깡통 흔들 듯 이 아기의 핏줄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말인가.


요즘은 질병도 대개 유전병이라, 유전자 염색체 한 조각 떼어내어 고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염색체 보다 핏줄을 믿는다.


핏줄에 아로 새겨진 조상들의 내역을 추적한다. 종로 네거리에 흥건히 쏟아진 4. 19의 뜨거운 피, 6. 25 동족상잔의 차디찬 3년의 겨울, 8. 15 민족의 대 폭발, 초근목피의 식민시대, 이순신, 정몽주, 이성계, 계백과 김유신, 낙화암, 을지문덕과 광개토대왕….


핏줄에 아로새겨진 해독할 수 없는 흔적들…. 그게 모질 게 흔들린 모양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떼어먹고 달아나는 몰염치성이 아직 민족의 핏줄에 흔적으로 새겨지지 않은 거다.


며칠 후 여인 하나 지나치며 “안녕하세요.” 반갑게 웃는다. 돌아보니 아기의 엄마다. 태국에 와서 낯선 성인 여인에게 인사 받아 보긴 생전 처음이다. 그래 우린 눈치코치 모르는 어린 핏줄로 다시 만나고, 이야기하며, 활짝 웃는다.


핏줄. 더러운 흔적일랑 못 본체 돌아서시고, 오로지 순수로만 영원히 흐르소서.

3 Comments
장보고 2007.04.30 16:40  
  느낌을 주는 글이네요.....
반성합니다.
차우츄 2007.05.05 19:12  
  잘 새겨 들었습니다..... 잘...
쿠스훼밀리 2007.05.14 12:20  
  좋은글 감사히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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