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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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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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6 1493

작년 태국에서 석 달 동안 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당초 계획이 여의치 않아 귀국했고 태국 말을 미련 없이 잊었다.


그런데 태국어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외사촌이 비닐하우스 작물을 재배하는 관계로 태국인을 세 명이나 고용하고 있는 거다.


“사왓디 클랍(안녕하세요).” “안뇽하세요.” 첫 대면이 시작 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말이, 태국 말이 나와 주지를 않는다. 도통 써먹지 않았으니 까먹을 수밖에.


버릴까하다 접어둔 태국어 교본을 읽는다. 태국에서 수십 차례 반복학습으로 이력이 났거니 하고 초반은 대강 넘기고 후반부를 읽는데 아니올시다. 이게 도대체 뭐냐. 작년에 달달달 외다 시피 읽고, 읽어서, 읽으면, 읽으니, 잠꼬대 할 정도로 기를 쓰며 배우던 거 맞냐.


다시 만났다. “안녕”에서 “너 언제 한국에 왔니?” ‘온지 8개월이고 도착했을 때 겨울이라 추웠으며 눈을 처음 보았다.’ 이 정도면 꽤 진보한 거다. 그러나 또 막힌다. 막히니 답답하고. 답답하니 귀찮고. 에라, 태국말 쏼라 거린다 해서 내 인생, 얘네들 일상에 득 될 거 없으며 뙤약볕에 일하는 애들 말시켜 작업 능률만 떨어뜨릴 것 같아 접기로 했다.


또 다시 만났다. 마지못해 몇 마디하고 떠나려니 이놈들 어찌나 반색을 하는지, 제 할아비를 만나도 이보다는 못하지. 수만리 타국에서 자기 말할 줄 아는 이 한국인이 구세주로 보이는 모양이다.


밤 새워 읽는다. 태국어 교본이래야 태국말은 발음기호로, 뜻은 영어로 표기한 얄팍한 공책 비슷한 거라 온당한 책이랄 것도 없다. 기호들의 나열일 뿐.


처음부터 꼼꼼히 읽는다.


… 두 디디(잘 보아라) 황 디디(잘 들어라) 킷 디디(깊이 생각하라) 풋 당당(크게 말하라). … 40도가 웃도는 폭염. 이글이글 타는 태양 아래 도심지 출퇴근 시간대면 교통체증으로 시달릴 때, 짜오뿌라야 강 지류엔 100여명을 태운 나룻배가 쏜살 같이 달리고, 아름드리 자주색 빠나나 꽃이 피고, 출근길 한 복판 스님 한 분 부여잡고 간절히 기도하는 미니스커트의 아가씨…


…“쿤 빠이 어라이 클랍(어디 가시게요).” “폼 ‘빠이 디에우(여행 갈란다).”…


… 오토바이로 달리는 수코타이, 자전거 여행의 아유타야, 남편이 경찰이라는 젊은 여인과 찍은 한 장의 사진… 태국어를 같이 배우던 룸메이트 ― 러시아, 일본, 프랑스, 영국 여인들… 한바탕 아우성치는 소낙비 지나가자 지평선에 떠오른 거대한 무지개…


… 주말이면 어김없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모임. 일주일 내내 태국인들하고만 태국말로 떠들고 듣고 말하고, 태국 밥만 먹고, 태국 물만 마시고…. 조국 동포들 만나 밤새워 술 마신다. “수신제가(修身齊家)란 말이 있지. 그거 맞는 말일까. 수신을 하면 제가가 될까?” “아암 되고말고.”… 어느 틈에 방콕 도심 속 한국말이 서럽게 취한다. …


19세기와 21세기가 혼재하는 도시. 외국인 2, 300명이 사는 아파트에 ‘뉴스 페이퍼’가 뭔지 모르는 녀석이 경비를 서는가 하면, 버스 차장, 초등학교 어린이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시내버스가 개문 발차하며, 삼륜차, 오토바이가 차선을 마구잡이로 넘나들고, 지하철 지상철이 미끄러지듯 달리며, 장거리 여행버스는 에어컨을 최대한으로 가동해 손님 바짝 얼려 죽일 작정인지. 춥다면 에어컨을 끄는 게 아니라 담요를 덮어주는 이 친절은 비행기 스튜어디스에게서 배운 것인지 마음껏 사치를 부려보자는 심사인지. 비만 오면 정전(停電)하는 아파트, 그러나 더몰, 빅씨(대형매점 또는 백화점), 아웃렛이 첨단을 자랑하는 방콕은 꿈틀거리는 한 마리 거대한 공룡.


시작도 끝도 없는 98쪽 사이사이 스며든 열사의 나라 밤하늘, 달, 별,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그리고 기억의 파편들.


삐리리 이름도 모르는 새 한 마리 울기 시작한다. 삐리 삘리 삘릴리 두 마리, 셋, 넷… 삐삐삐삘리리… 수십 수백 마리 새들이 열대림 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새벽 5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기지개를 켜며 아- 첫 하품소리에 툭 떨어지는 석류 꽃 한 송이. 명멸하던 전깃불이 여명으로 사위어 갈 때, 밤새 뒤척이던 태국 아파트에서 문을 열고 한 발짝 내 딛자, 컹컹 난데없는 똥개 한 마리, 한국 나의 집 마당이다. 손에는 태국어 노트 들려있다.

6 Comments
cromred 2008.09.24 06:16  
  그냥....아름답다는 느낌뿐....beautiful...
그냥 시골 새벽아침 논두렁 거니는 느낌....ㅎㅎㅎ
그냥 제 느낌입니다....ㅎㅎㅎ
narak 2008.09.24 10:06  
  그 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글 맛은 여전하시군요....건강하세요 ^^*~
방나촌장 2008.09.24 11:22  
  유토피아님 잘 계시죠...
태국 놀러 오세요...쌩쏨한잔 대접하겠습니더..
유토피아. 2008.09.25 02:56  
  반갑습니다. 크롬레드님, 나락님, 방나촌장님. 어젠가 다시 뵙겠지요. 아녕...
순이아빠 2008.09.28 02:30  
  건강하신지요?
이제는 순이아빠가 아니라
상민이 아빠가 되었습니다
언제 한국들어가면 우리 아들내미 보여드려야 하는데...
유토피아. 2008.09.29 09:15  
  반갑습니다. 그리고 축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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