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판(보따리 무역)으로 시작하여 ,,,, 나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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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판(보따리 무역)으로 시작하여 ,,,, 나이키

나라라 0 2070
■ 나이키

일종의 좌판(보따리 무역)으로 시작하여 전세계 연간 매출 90억불이 넘는 나이키의 성장사를 살펴보면 전형적인 벤처기업(Start-up Company)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고 또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인연으로 연결되는 인간관계, 작은 회사가 커가면서 보여주는 생존에서 인류애로의 사회적 책임, 적절한 파트너 선정과 전략적 제휴, 끊임없는 도전과 창의력, 순간적 임기응변, 급속한 성장의 후유증과 대처능력, 오늘날 스포츠 브랜드가 당면한 문제들, 스포츠 브랜드의 미래 설계 등 나이키사는 그들의 성장사를 몇 단계로 나누고 있는 데 가능하면 그 구분 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창업 전단계 Before the Beginning 1957-1961
BRS(나이키 전신)와 Tiger(일본 아식스 전신)의 파트너쉽 1962-1971
BRS에서 NIKE로 1972-1980
경쟁의 시대 Nike becomes a Player 1981-1991
자신과의 싸움 In our own League 1991-현재

두 남자의 만남-창업 전 단계 (Before the beginning)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이키의 창업과 성장은 보여준다. 대학 육상선수와 코치로서 Phil Knight와 Bill Bowerman는 1957년 미국 오레곤대학교(University of Oregon)에서 그 운명적 만남을 가지게 된 후 그 둘은 서로의 역할 분담-보어맨의 혁신적인 디자인(Innovative design)과 나이트의 비즈니스 통찰력 (Business acumen)-을 훌륭히 하면서 나이키의 성장사를 만들어 온다.

보어맨은 육상코치였지만 선수들의 기록단축을 위해서는 신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신발을 직접 만들어 선수들에게 착용시켜 기록을 갱신시킬 만큼 운동화에 관심이 많았다. 한편 나이트는 부상으로 육상선수 생활은 그만 두었고 1960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Stanford Business School(MBA 과정)에 입학한다.

한편, 지난해 6월 보어맨이 나이키를 그만둘 때 나이트는 미화 5천1백만불을 출자하여 그를 위한 재단을 설립해 보어맨이 평생을 이바지해온 청소년용 육상경기장 개보수 및 관련 시설 현대화 사업을 지속시키고 있다.
1999년 12월 24일 보어맨이 88세의 나이로 죽자 나이키사는 그의 유업을 계승시키기 위해 세계 최첨단의 육상화 개발을 위한 팀을 구성하는 한편 이 운동화의 브랜드명을 "Bowerman"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경우 사업을 시작할 때 두사람이 공동 창업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나이키는 이중 성공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사업 성공에 있어 인적 구성과 역할 분담, 인연의 중요성을 나이키는 보여준다

사업의 시작 -BRS 와 Tiger와의 만남

스탠포드 경영대학원(MBA과정)에 입학한 필 나이트는 1962년 '일본의 우수한 운동화로 독일의 미국 운동화산업 지배 돌파(about breaking Germany's domination of U.S. athletic shoe industry with affordable, high-tech exports from Japan)' 라는 시장 조사 논문을 쓴다.
그는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 가 'Onisuka Tiger Company(ASICS 의 전신)' 를 방문한다. 이때 Onisuka는 미국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시기라 나이트의 방문 상담은 아주 시기 적절한 것이었다. 이때 Onisuka관계자가 나이트에게 어느 회사에서 오셨느냐는 물음에 순간적 (Ad libs)으로 "Blue Ribbon Sports" 라고 대답하므로 Nike의 전신인 BRS가 태어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업에 있어 타이밍과 기회의 포착. 순발력 등의 중요성을 나이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한편, 1963년 12월 BRS는 Onisuka로부터 운동화 200족을 처음 수입한다.
200족을 가지고 나이트는 육상선수였던 자신의 전력을 바탕으로 선후배가 코치로 있던 각 학교의 운동장(고객이 있는 현장)으로 찾아가 첫 매출을 일으킨다. 이에 그 가능성을 인식한 나이트는 이듬해인 1964년 보어맨과 각각 미화 500달러씩을 출자, 1000달러로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든다.(현재 매출 10억불의 세계 최대 스포츠용품 회사도 처음에는 신발 200족, 자본금 1000달러, 단 2사람-이 당시 보어맨은 육상코치직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영업은 나이트 한 사람-에서 출발했었다는 점이 벤처기업의(start-ups) 전형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때 보어맨은 신발 디자이너로, 나이트는 판매관리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데 이해 BRS는 1300족의 타이거신발을 수입 판매하여 8000불의 매출을 실현한다.( 주:보어맨은 1942 년부터 1972 년 Nike 출범 전까지 오레곤대학 육상코치로 활동)

1965년, 학생시절 한때는 나이트의 육상라이벌이었던 Jeff Johnson이 BRS의 최초 전일 근무자(First full-time empolyee)로 입사하는데 그 또한 Nike 성장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으로 특히 국내 판매부문에서 커다란 업적을 쌓는다. 창업자 나이트 혼자 소위 말하는 사원에서 사장직까지 수행하다 새로운 인원을 충원한 것이다.
J. Johnson은 입사한 다음해 BRS 최초의 직영판매점 1호를 개설했는데 아마 친구인 그들의 기쁨과 미래에 대한 전망은 대단했었리라. BRS의 기술다자인부문 창업자인 보어맨이 1968년 설계한 Cortez 육상화가 일본의 타이거사에서 개발되어 그후 양사의 Steady-seller model이 되었다.
1969년 BRS는 직원이 20명에 이르는데 이때 비로소 나이트는 사장 본연의 업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해 매출은 미화 30만달러를 달성한다.
1971년 BRS는 한단계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다. 즉, 일본종합상사인 니쇼이와이와 파이낸싱 및 업무 협력 계약을 맺음으로 무엇보다 수입한도운용, 환차를 비롯한 외환관리 , 재고관리 등에서 신축성과 도움을 받음으로 새로운 도약의 기반을 구축하고 미국에서 개최된 1972년 하계올림픽을 계기로 NIKE로 회사명까지 바꾼다.
또한, 이해에는 Nike의 상징으로 오늘날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이고 세계의 모든 젊은이와 스포츠 애호가들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Swoosh가 단돈 35달러에 대학생인 Carolyn Davidson에 의해 디자인 되어 탄생한다. 현재 우리 나라 환율로 단순 환산한다면 4만원이 채안되는 돈이다. 회사 로고나 캐릭터로 고민하시는 분들에게는 희소식이다.

초창기 Nike의 전신인 BRS의 출범과 성장을 보면, 한사람이 세운 꿈과 야망, 그리고 맺어진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 사람의 운명과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느낄 수 있다. - 만남, 자신들의 장점과 경험을 살린 역할 분담, 적절한 파트너의 선정과 그들과의 공존공영,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무의 환경하에서 하나하나 착실히 쌓아가는 열정, 그리고 글로벌한 시각과 전략.오늘날 세계 스포츠브랜드 시장을 이끌고 있는 Nike-Adidas-Asics의 인연들이 재미있다. 나이트가 미국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당시 독일의 Adidas를 타도하기 위해 일본의 신발생산회사를 선택하고, 그기에서 Asics의 전신인 타이거와 동맹(?)을 맺어 나중에는 세계를 재패하는 것은 마치 한편의 병법이나 전략서를 보는 것 같다.

나이키 이야기-신발 벤쳐의 원형- (2)
BRS에서 Nike로 (1972-1980)

1972년 BRS는 Onitsuka Tigert사와 의견이 맞지 않자 미국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을 계기로 Nike 브랜드를 출시함으로 본격적인 Nike 시대를 예고한다.
이 해 BRS는 캐나다에 최초의 국외 진출을 도모, 세계적인 브랜드로의 첫 발을 내딛는다.

1973년 미국 기록 보유자인 Steve Prefontaine 이 유명육상 선수론 처음으로 Nike 신발을 착용해 동사의 움직이는 광고판이 되면서 소위 말하는 나이키의 스포츠스타 마케팅이 출발하게 된다.
BRS가 처음으로 스폰서한 Steve Prefontaine은 1975년 자신과 BRS의 꿈을 다 이루지도 못 한채 아깝게도 죽는다.

1972년 이후 육상 코치직을 그만 두고 BRS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공동창업자 보어맨이 1974년 개발한 새로운 Waffle Trainer 아웃솔 신발이 미국의 Best-Selling Training화되었다. 이 해 BRS는 호주에 판매망을 구축했으며 미국에 처음으로 자체공장을 Exeter N.H.에 설립해 자생력을 강화시켜 나간다. 1974년 나이키의 종업원은 250여명에 이르고 매출은 미화 4백8십만불 가까이 되었다.

1977년 BRS는 “Athletics West"라는 엘리트 선수들을 위한 미국 최초의 육상전용(track-and- field)클럽을 출범시키는데 이 후에도 나이키는 육상경기의 발전과 선수 발굴, 특히 꿈나무 선수들에 대한 지원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기업의 건전한 발전과 회사 이익의 사회 환원 이라는 자발적인 지원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1990년대 후반 들어 제기된 나이키 제품을 생산하는 개도국 근로자의 저임금과 인권 유린 문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더욱 엄격히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이나 성공적인 벤처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에 본보기로 여겨진다.

1977년 나이키는 그 판매지역을 아시아로 넓히기 시작했으며 한국과 대만에서 OEM 생산을 개시함 으로 Nike 성장사에 있어 우리 나라의 기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00족이라는 물량으로 출범한 단순 수입 판매회사가 그 동안 관계를 맺어온 일본이라는 생산 근거지를 떠나 최적의 생산체제 구축을 위해 드디어 글로벌 아웃소싱 전략을 채택하므로 오늘날은 흔한 사례로 일켜어지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기획은 본사에서 하고 생산은 자체 공장 없이 최적의 해외 하청 공장에서 만들고 그렇게 생산된 제품을 전 세계를 대상으로 판매마케팅한다는 지식경영의 비즈니스 모델이 나온 것이다.

1978년 공식적인 Nike Inc 가 비로소 출범하고 이해에 테니스 스타 John McEnroe와 스폰서 계약을 맺으며 남미와 Adidas가 지배하고 있던 유럽에도 나이키 신발이 진출한다.

1979년에는 그 유명한 Nike-Air cushioning 이라는 Tailwind 신발이 출시되고 최초로 나이키 의류를 시장에 선보여 미국 매출의 반을 점유하는 성공을 이룩한다. 또한 나이키가 런닝화 부문에서 1위의 시장 쉐어를 기록한다.

1964년 1,000불로 설립된 나이키는 16년만인 1980년 마침내 증권시장에 등록, 2백만주를 일반에 공개한다.
아울려 Exeter에 나이키스포츠연구소(Nike Sport Research Lab)를 개설했는데 이 해 종업원은 2700명, 매출은 2억6천9백만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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