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빠이(Life of Pai) 4. 여기보다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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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빠이(Life of Pai) 4. 여기보다 어딘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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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기만 하여도 울렁, 생각만 하여도 울렁

 

 

필사의 힘을 다해 뒤쫓아도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아 이러다간 제명에 못 살지 싶어 체념하고 돌아서면 옳거니!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뒤통수 한방을 세차게 후려치는 우연, 또는 인연, 때론 악연, 혹은 필연이라는 이름의 피할 길 없는 손찌검. 통상 그 무슨 예고나 전조, 암시나 증후도 없이 대뜸 다가오기에 어떤 날에는 작열하는 태양으로 숙성된 열대과일처럼 오지게 달콤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실험정신 투철한 카카오 99%처럼 쓰기만 무지하게 쓴 무규칙 변종 플레이. 결국 착하게 살아야겠구나, 마음 한구석이 숙연해지고야 마는 불가항력의 외나무다리.

 


한 세월 과감하게 거슬러 올라 대략 십여 년. 즐거이 만난 시절이 있었고 안타까이 못 만난 시간이 있었던 선배. 결핍이 낳은 동경일 터, 경거망동의 기린아이자 안하무인의 선봉장으로서 자발없이 나대고 가남없이 싸대며 분노를 삶의 동력으로 삼아 주둥이에 쌍시옷 발음을 달고 사는 나하곤 아예 종족이 다른 인간. 다른 세상이라곤 꿈도 꾸지 못하고 살던 촌구석 무녀리인 내게 하나의 상징에 다름 아니었던 사람.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이야기 <신도 버린 사람들>의 한국 버전에 사진을 실은 작자 김종길(이하 K), 그가 빠이로 오던 날,


 

물은 만물의 근원이요 모든 생명의 종실이다(萬物之本源, 諸生之宗室), 설파했던 관자(管子)의 철학을 적극 수용한 물 좋은 호스텔 스파이시를 정리하고 나와 태국에서 가장 큰 망고나무가 있다는 먼데이마켓 인근, 그가 아는 어떤 사람이 아는 어떤 사람, 그러니까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의 집에 짐을 풀고 난생 처음 홈스테이라는 체제를 선택, 부산을 떠나 인천을 넘어 방콕을 거쳐 치앙마이에 닿았다가 이튿날 아침 빠이에 도착한 그를 마중하러 나갔다.

 


인연이라거나 필연이라거나 하기는 좀 낯간지러워 우연을 빌미로 삼자면 그가 빠이로 오게 된 까닭은 느닷없이 날아든 우연이 우연에 우연을 낳은 것이었으니 오래전에 소개받았던 한 여행자와의 술자리에서 비롯된 약속, 고산족 아이들의 사진 한번 찍어달라는 그 부탁에 응하기 위해 여차여차한 상황을 발판 삼아 하필 딱 내가 머무는 그 시점에 먼 길을 날아온 것.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른다니까!

 


빠이 컨트리(Pai Country), 술도 팔고 밥도 팔고 커피도 팔고 웬만한 건 다 파는데다 웬만큼 수준이 있어 늘 북적이는 그 가계에서 격하게 재회해 투박한 듯 정감 넘치는 원목 의자에 앉아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산뜻하게 모닝 알코올을 흡입하고선 빠이의 3대 커피숍 중 하나라는 올 어바웃 커피(all about Coffee), 놀러왔다가 눌러앉게 된 전형적인 케이스로 방콕에서 생활하던 남녀가 오래된 목조건물을 인수해 멋스럽게 되살린 뒤 내친김에 눈까지 맞아 부부가 되었다는 로맨틱한 전사를 가진 갤러리 카페에서 맛이 제법이라고 소문난 커피 한잔을 때리고 배낭을 거두어 새로운 숙소로 난입. 그로서 다시 만난 K와 함께, 그리고 빠이에서 장기체류하는가 하면 어디 놀러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 호스트 커플(이하 동거남, 동거녀)과 같이, 당시엔 생각지도 못했던 무려 두 달 간의 합숙을 시작하며 빠이 여행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날이면 날마다 호화로운 한식에 유쾌한 술 마시며, 또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어울리며.


 

외부 이주민들이 많아 집을 빌려주는 곳도 많은 빠이에서 집 한 채를 얻어 여행인 듯 일상인 듯 살아가는 그들에게 얹혀살게 된 것은 K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터, 사람 하나 잘못 들였다가 잔뜩 피곤해진 그들과는 달리 나로서는 다방면으로 운이 좋았으니 일단 밥이 어이구, 아주 훌륭해! 여행자의 밥상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논문이라도 한편 써야하나 싶을 정도. 요리가 취미이자 특기라고 해도 무방한 동거남의 취향에 적극 동의를 표하며 동거녀와 K는 동거남의 진두지휘 아래 갖가지 요리를 만들어냈는데 그 장르별 분류를 거들떠보자면 한식에서 중식을 넘어 일식과 동남아식, 온갖 서양식이 종횡무진 넘나들기에 이르러 각종 찌개와 국, 찜과 탕, 볶음과 조림, 무침과 튀김 등등 삶고 찌고 굽고 해대며 무차별적으로 오가는 경지에 다다랐다. 때론, 이 사람들은 하루의 한 끼의 대찬 저녁식사를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닐까, 의심될 만큼 대단히 열정적인 장보기와 조리과정을 통해 상찬을 마련하였고 나는 매양 그렇듯 인생 날로 먹어보자는 취지하에 숟가락만 첨부하였다.


 

이쯤에서 잠시, 이야기의 수순에 입각하여 동거남과 동거녀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도 좋을 일이나 드라마적인 출생과 태생에 짝패처럼 얽히는 (사실 너흰 남매란다, 따위의) 비화, 성장 배경과 활동 지역, 표류의 원인과 체류의 명분을 비롯한 여하의 정황과 저간의 사정을 소상히 밝혀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기엔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사회적 파장과 혼란을 고려하여 차치하기로 한다, 라기보다는 주목받지 못해 안달이 난 작자들, 특출해 보이기 위해 모두를 팔고 전부를 바꾸는 자들이 있는 데 반해 조용히 초야에 묻혀 지내고픈 은둔야인들도 있게 마련, 그들이 그에 다름 아니니 머리 검은 짐승으로서 거둬들이고 먹여준 예의를 저버릴 수 없어 가뿐하게 패스하고, 그들과 함께 묶는 것으로 인해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도록 빠이에 눌어붙어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의 기꺼운 조우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전하는 바이다. 예정에 없이 그들의 리그에 자연스레 뛰어들게 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OECD 평균에 의거하자면 세 번째 만남에서 동침을 이루는 퍼센티지가 높다고 하니 평소 OECD란 게 뭐하는 잡것들인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으나 그래도 OECD 가입 국민으로서 평균에 미달되는 사태를 용납할 수는 없기에 당일로다가 날을 잡고 보기만 하여도 울렁 생각만 하여도 울렁, 바깥의 테라스에 누워 잡서적을 뒤적이며 갓 마음을 준 이국의 여인과 뜨거운 데이트를 즐길 생각으로 오매불망, 그녀의 퇴근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뜬금없이 날아든 한마디.


“530분 쯤 움직일까요?”

움직이다니, 어딜?

 


일상처럼 여행을 이어가는 호스트 커플과 싸돌아다니는 데에 크게 열정이 없는 K와는 정반대로다가 좀처럼 집구석에 붙어 있지 못하는 나로선 불철주야, 바깥으로 나돌았던 탓에 한국산 체류자들의 저녁 초대를 알지 못했으나 동거인 셋은 응당 알고 있을 거라 믿었던 바, 갈등의 시간은 예고 없이 찾아들었다.


 

당연하게도 안 간다고 했다, 처음엔. 아무런 고민이 뒤따를 수 없었다, 그때까진.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자꾸 꼬시네. 아가씨는 내일 만나도 되지 않냐고, 오랜만에 모이는 건데 이 기회에 얼굴이나 익히자고, 다들 재미있는 사람들이라고…… , 사람들은 다음번에 만나도 되는데, 오늘만 날이 아닌데, 재밌기로 치자면 내겐 아가씨가 제일 재밌는데…… 그럼에도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은 나 또한 빠이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궁금했기 때문, 결국 기다란 고민 끝에 그녀에게로 먼저 갔다.


어쩌지, 오늘 아는 사람들의 초대가 있었는데 깜빡했어. 미안한데 괜찮으면 내일 볼까? 하며 아쉬운 마음과 사죄하는 심정으로 차분히 사정을 전달하자 얼라리여? 설핏 기대를 품기도 하였으나 아무래도 낯선 사람들과 쉽사리 동화되지 못할 것 같았던 그녀의 성품을 십분 고려했을 뿐더러 영업시간이 한참 남았기에 으레 안 될 거라 여겼건만……

 


괜찮으면 같이 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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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녀가…… , 그녀가

 

 

해마다 사연 없이 피는 목련 없고 저마다 까닭 없이 오는 계절 없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에 이르는 시간을 낯설고 물선 땅에서 지내온 사람들. 무슨 예측 못할 사정이, 어떤 가늠키 어려운 사연이 있어 이역만리 타국의 촌구석 마을에서 자리를 잡고 또 뿌리를 내렸을까? 혹시 한국사회에 된통 데였나, 아니면 어디서 사기라도 왕창 치셨나, 것도 아니면 이장 집 딸내미 팔자라도 시원하게 조져 놓으셨나? 도대체 뭐하는 양반들일까?

 


아무래도 끼리끼리 통하게 마련이라고 잠시간의 여정이 아닌 기나긴 여로에서 가까이 두어 사귄 벗이라면 말이 다르고 색이 다른 종자들보단 절차 없이 소통 가능한 동일 민족일 확률이 농후할 터, 빠이 곳곳에서 나름의 생을 전개시키고 있는 한국인들은 뚜렷한 형식의 커뮤니티가 있는 것은 아니나 종종 그렇게 회동을 갖고 회포를 풀고도 했던 모양, 그날의 호스트는 지리산 칠불사에서 주지로 활약했던 한 스님이었다. 불타는 스무 살 시절, 연상의 연인과 함께 도주해 밀월을 즐겼던 곳이 지리산이었기에, 두해를 보내는 동안 밥하기 싫을 때마다 자주 들러 끼니를 얻어먹었던 칠불사이기에 스님과는 교차되는 이야기가 많을뿐더러 사람이, 사람이…… , 진짜 천생 양반인지라 싫어하는 이가 없었으며 나 또한 다르지 않아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OECD 평균에 근거하여 오늘쯤이 디데이렸다! 싶었던 예상과 추측, 기다란 밤을 함께 보내야겠다는 야심과 결심은 예정에 없던 초청으로 무산되고야마는가 싶었던 차, 친구에게 카페를 맡기고 기꺼이 따라나서겠다는 그녀가 어찌 아니 예쁠 수 있을까! 스무 살짜리들도 아니고 둘 다 서른이 넘어 2700cc 중형이냐 3000cc 준대형이냐, 고민하고 있을 나이에 125cc 스쿠터로 달리는 그녀와 나. 정서상 가난한 연인으로 빙의되어 서로의 두툼한 옷차림을 마주 여미고선 겨울 저물녘의 찬바람을 뚫어 모락모락 연기가 오르는 닭백숙을 대면했다. 벌거벗은 자태가 사뭇 고혹적이었다.


미취학아동 미포함, 얼추 열두서넛으로 이뤄진 인간 군상들의 예측 못할 사정과 가늠키 어려운 사연을 면면히 파악하고 샅샅이 검토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관심 밖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나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 하는 얘기나 들으며 닭을 조지는 일에 열중할 뿐. 닭 가슴살을 좋아하는 여자와 닭 껍질을 즐겨하는 남자라면 닭을 뜯는 데 있어 더없이 좋은 궁합일 터, 그녀와 나는 입장이 정반대였으니 역시나 좋은 궁합이었으나 사나이 체면에 조금 모양 빠지는 구석이 있기는 했다. 제가 주인인 양 걸쭉한 양반다리를 하고 거푸 독주를 비워대는 내 곁으로 조신하게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말없이 가만히 먹으며 묻는 말에 은은한 미소와 함께 엷은 고갯짓으로 답하는 그녀가…… , 그녀가…….


나는 약한 사람이야. 그리고 느린 사람이고.”


 

하늘이 깨끗해 별도 달도 잘 보이는 바깥의 난간에 팔을 괴고 우리는 담배를 태웠다. 약하고 느린 너를 위해 강하고 빠른 내가 존재한다는 듯, 저 하늘에 별도 달도 따주마, 는 고전적 레퍼토리를 아무렇지 않게 시연했다. 본래가 응당 그렇다는 듯이.


 

어이, 아가씨. 나는 네가 무얼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아. 그러나 나는 노멀 펄슨(normal person)이 아니야. 네가 원하는 곳, 거기에 내가 있을 거야. 넌 걱정할 필요 없어. 중요한 건 내가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야.”


 

확실히 정상적인 인간이 못 되는 나는 비정상적인 언어의 조합으로 그녀를 다독이고선 낮은 어조로, 두터운 어투로 이야기를 담담하게 펼쳐나갔다. 나란 인간에 대해, 그 인간이 어떤 삶을 살고 왔고 살아가려 하는지에 대해 가감 없이 풀어나갔다. 아무 의식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왔던 산송장의 나날들, 하나의 죽음 같은 시간을 통해 비로소 흐릿하게나마 마주하게 된 자아, 스스로 뿌리를 잘라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려는 길바닥 위의 삶…… 두어 개비의 담배가 이어지는 동안의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그러니까 나는 이제 더 이상 바보가 아니며! 원하는 삶이 뚜렷한 고로! 이제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그 말씀이니 이를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랑 살림 차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삶이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세 번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전 존재를 던져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고백 역시도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나랑 살림 차릴래 말래?

 


그런 것 같다니? 뭐가 그런 것 같다는지는 모르겠으나 눈빛이 꽤나 삼삼해진 그녀의 분위기로 가늠컨대 자세의 전환이 필요한 듯싶어 가벼이 어깨를 감싸자 그녀의 양팔이 허리춤에 물려들었다. 마주 끌어안은 몸이 따뜻하여 호흡이 붉어졌다. 보드라운 입맞춤이 뒤를 따랐다.


 

, 나 너무 졸려.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어.”


 

돌아가서 쉬어야겠다는 그녀와 돌아가서 같이 쉬어야 하는가? 지금이 과연 실로 그러한 타이밍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고민하고 있자 그 검은 속내 다 안다는 듯 이따 다시 볼래?


 

두어 시간 후 밤 11, 느지막하게 공연이 오르는 빠이의 대표 클럽 비밥(Bebob)에서 재회하기로 하고 잠시간 휴지기를 갖기로 했으나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다음날 아침 11시에 이르러서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세계평화를 기원하며 모닝 알코올을 흡입하고 있자 띠릭, 그녀의 메시지가 당도했다. 지구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SNS를 통해.

 


, 어제는 미안했어. 아파서 나갈 수가 없었어. 가능하면 지금 집으로 와 줄래?”

 


K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혼자 보낼 거냐고 묻지 않았다면 나는 혼자 보내려 했다. 나보다 동네 지리에 이만 배쯤 밝은 데다 나는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내 아무리 예민하고 명민하다고는 하나 별다른 특색도 없는 스님 집을 그 야밤에 백 프로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려웠기 때문, 결과적으로 그 밤 그녀를 에스코트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의 집을 몰랐을 테니 그녀가 나를 집으로 부르는 일도 쉽지 않았을 터, 생각해보면 다 그러려고 그랬던 것이다. , 그렇고말고.


 

하릴없는 오전, 느긋하던 물살은 흐름이 급변했다. 일단 깨끗하게 몸을 씻고, 물론 잘 차려입고, 또한 국제적 우호증진을 위해 접대용으로 구비하고 있던 경남제약 비타민 C 레모나도 챙기고…… 무슨 죽이 좋을려나? 또 어디가 맛있을려나? 왠지 깔끔하게 음식을 조리할 것 같은 빠이 컨트리에서 야채 죽을 사고 물과 음료를 챙겨 빙판을 집어가듯 조심스레 액셀을 당겼다. 만약 가다가 자빠지기라도 하면 나는 죽을 다시 사야하고 그녀는 기다려야 하니까.


 

초록이 드리워진 적당한 조망과 부엌을 겸한 적당한 테라스와 적당한 사이즈를 지닌 적당한 방과 적당한 배치를 이루고 있는 적당한 욕실은 독신 여성이 혼자 살기에 적당해보였다. 성격 이상하고 꼬라지 기괴하고 쌍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한국인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에도 역시 적당해보였다. 차가운 그녀의 방, 담요를 뒤집어 쓴 채 핏기 없는 얼굴로 훌쩍거리는 그녀가 가엽고도 사랑스러웠다.

 


이 아가씨를 위해 가재도구를 사들이고 음식이라도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살림을 위해 보편적으로 구비되었어야 했을 것들이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부재했다. 쇠숟가락 하나가 없어 아이스크림 퍼먹을 때 쓰는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야채 죽을 섭렵하고선 한 모금 물을 들이켜고 레모나 하나를 씹으며 아이 셔,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 잘 잤냐고. 맞춤한 취기가 일었던 어제는 늘어진 개처럼 잘 잤다. 해서 말했다. 못 잤다고. 밤새 뒤채이며 잠 못 들었을 그녀와 한마음 한뜻으로 몸을 포개고 한 이불을 덮기 위해. 하여 그리 했다. 유독 몸이 차가운 내게 흠칫 놀라는 것도 잠시, 이내 자리를 잡은 듯 뜨겁게 말려들어 견고하게 똬리를 틀었다. 커튼이 둘러진 창으로 엷은 볕이 아늑하게 내려앉아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그녀의 호흡이 한열의 부침을 반복했다.

 


부스스 눈을 떠 맞은 저물녘,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길바닥 인생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으니 나는 어찌할 것인가? 지나왔던 여로를 되짚었고 나아가려 했던 여정을 둘러봤다. 본래 목적했던 인도는 언제쯤에나 가게 될까? 심심풀이 삼아 물수제비를 뜨듯 가볍게 상상을 굴리고 있자 단장을 마치고 나온 그녀가 뭘 생각하고 있냐는 듯 내 기다란 모가지를 끌어안았다. 여기 이곳에 있어줘서 고맙다며. 갑자기 목울대가 후끈거렸다. 그로서 인도는 당분간 텄다.

 


색색의 활기로 메워진 시내에서 함께 나누는 저녁식사. 어디서 김치찌개에 소주나 한 사발 했으면 싶었지만 빠이의 현실적 한계선을 수렴하여 그녀가 어릴 적부터 즐겼다는 월남쌈을 맛있게 먹는 척하며 맥주를 열심히 마시고 있자 야외 테이블 가까운 도로변으로 끼이익, 울리는 스쿠터의 브레이크 소음. 환한 웃음과 함께 기다란 생머리를 지닌 그녀의 친구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아! 콘 까올리(한국인), 어쩌고 하더니 가벼운 손짓과 함께 사라졌다. 빠이에서 빵집을 하고 있으며 남자친구는 미국인으로 식당을 하고 있다는 그녀의 설명에 나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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