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녀들. 프롤로그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던 작은 새들이 있었다.
무엇의 간섭도 허락도 필요 없이, 누구의 방향과 질서에도 관계없이, 어떠한 관념이나 굴레에도 변함없이. 그저 거침없이, 마냥 거리낌 없이, 아무 거치적거릴 것 없이 비상하며 날갯짓하던 자들. 고도의 청아한 대기를 누비고 짙푸른 햇살에 몸을 적시며 부드러운 바람에 빗살을 새기는 그들의 비행은 더없이 자유로웠고, 자유로웠기에 더더욱 아름다웠다.
날개의 생래적 부재로 날지 못하는 인간에게 새들의 비행이란 자유에의 완벽한 상징이자 가장 근사한 은유가 아닐 수 없다. 결핍은 선망을 낳는 법, 또한 시기와 질투를 동반하는 것. 언제나 그러했듯 인간의 질시란 유해했으며 그 유해성은 대상을 필요로 했으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사랄까? 불행히도 그 자유로운 새들에게 낙찰, 이에 근원적 비극이 시작한다.
사돈이 땅을 산다는 경제 물리적인 현상이 복통이라는 인체 화학적인 반응으로 변이되는 독특한 형질을 지닌 인간들, 그 예측 불가능한 성질에서 비롯된 가공할 저주로 말미암아 새들의 유려했던 날개는 그만 황금으로 변해버리고 자의와 무관하게 비행을 멈추게 된 그들은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으니 땅으로 내딛는 한 발짝, 그 익숙지 않은 걸음은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깊게 어지러웠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상의 대척점으로 기능하는 여행, 보편이 아닌 파격을 살아가는 데 있어선 보다 특수한 행동이 필요하다(뭐, 그렇다고 발가벗고 칼춤을 추거나 작두를 타자는 건 아니고). 그러니 집이 아닌 타지를, 그것도 고국이 아닌 이국을 여행 중인 내가 지금 이렇게 내처 잠이나 주무시고 계실 때가 아니다! 라는 생각에 번쩍, 눈을 뜨고 벌떡, 몸을 일으킨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어둠,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기억. 천지 사방으로 짙게 드리워진 밤의 그림자는 시각인지능력을 무력화시켰고 공간지각능력을 제로화시켰다. 아,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잠시간 멍청하게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엄마 찾아 삼만 리를 떠난 아이의 심정으로 나를 벗어난 상황인지를 애타게 찾아 헤맸다.
곧이어 나는 남한에서 날아온 서른네 살 잡순 날건달, 서영진 씨라는 건 알겠는데 여기가 어딘지는 당최 감이 잡히질 않는다. 피부에 와 닿는 온도가 제법 앙칼지고 쌀쌀맞은 것으로 보아 뜨끈뜨끈한 방콕이나 캄보디아는 아닌 것 같고 그럼, 베트남 북부 하노인가? 아니다. 하노이를 떠나온 기억은 명백하다. 택시비를 이만 원쯤 준 것도 뚜렷하다. 그렇다면 여기는 라오스 어디쯤인가? 그래, 그럴 수 있다. 라오스 북단 루앙프라방이라면 이렇게 추울 수 있다.
모든 통로는 문 너머에 있다는 암시랄까, 바깥을 투영한 창문이 밝다. 빙고! 창문을 열어보면 알 일이다. 깊은 어둠으로 보아 한밤중일 것이나 자고로 여행자란 시간의 변이에 따른 인류의 관념화된 행동지침을 과감히 거스르는 족속들, 마치 올빼미의 친인척이라든가 드라큘라의 피를 수혈받아 야행성으로 변화한 신인류라는 듯이 늦은 시각에 개의치 않으며 마당에 불을 피우고 기타를 튕기며 미적지근한 맥주, 혹은 싸구려 위스키를 들이붓는가 하면 적잖이 알콩달콩하고 상당히 부끄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을 터, 그들을 보면 여기가 어딘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
주저 없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어라, 근데 이게 뭐지? 홀로 밝은 가로등과 푸른 잎 하나 없는 가로수. 그 위론 하얀 눈발이 거세게 휘날리는 살풍경의 삼위일체가 어안이 벙벙한 시야에 들이쳤다. 잠시간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멀리서부터 달려오던 시간 하나가 순식간에 부딪히며 급박하게 맞물렸다. 그렇게 얼마,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일말의 예상도 허락지 않은 반전과 지나치게 파격적이며 극도로 우울한 결말이 거기 있었으니 대부분이 아열대 또는 열대에 속하는 인도차이나에선 하얗고 몽글몽글한 눈, 하늘에서 내리는 그런 눈, 영어로 Snow를 볼 수 없다(막장의 기상이변이 아니고선). 그럼 나는 지금?
그렇다! 나는 사우스 코리아, 남한 땅 내 집, 전남 담양의 촌구석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아아! 벌써 몇 번째인가? 이렇게 새벽녘 놀란 듯 깨어나 어리바리 멍 때리다 창문을 열었던 기억이. 이른바 여행 후유증, 나는 멀미를 겪고 있다.
지는 해의 끝자락과 오는 해의 첫 자락을 관통하는 시간, 태국 방콕을 시작으로 캄보디아를 넘어 베트남을 지나 라오스를 찍고 다시 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그야말로 예정할 수 없었던 순간을 살았던 나는 수많은 미지와 조우했고 수많은 쾌락을 향유했으며 수많은 사람으로 인해 행복해야 했다(콕 집어 연령 불문, 국적 불문, 피부색 불문하는 미녀들과의 음주 타임! 아, 이건 뭐 필설이 어렵다). 어제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패감과 내일에 드리워진 불안을 길거리 십 원짜리처럼 철저하게 외면하며 온전히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았다.
시간이란 흐름에 따라 기억이 고착화되는 과정인 것, 절대적인 차원에선 동일한 크기와 길이, 부피를 지녔다 할지라도 상대적인 의미는 상이하고 때론 판이하다. 내겐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은 한때가 다른 이에겐 처절한 절망의 기록일 수도 있고 타인의 영화 가득한 날들이 내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주검의 나날일 수 있듯이 균일하지도 균질하지도 않다는 면에서 잔인하기도 아름답기도 하다.
돌이켜보는 시점에서 그저 빠르기만 했을 뿐 내가 뭘 했는지,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 그 무엇으로 인해 힘들었거나 즐거웠는지, 그 누구로 인해 고통과 환희의 순간을 엮어냈는지 등등의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다면 그건 매일 매일이 피차일반, 피장파장,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초지일관의 자세로 깨달음을 향해가는 구도자가 아닌 이상 곡선이나 폐곡선, 낙하와 상승이 없는 수평적 삶이란 고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온 나, 블랙아웃의 나날을 살고 있다. 과도한 알코올 흡입으로 기억의 입출력 장치가 먹통이 되어 급기야 제 부모도 몰라본다는 그런 상태. 별다른 희로애락의 여지 없이, 그 무슨 골똘한 성찰이나 오롯한 의지 없이 그저 육체에 박여 관성만으로 생활 가능한, 하여 종국에는 아무것도 되새길 수 없는 그 백지의 시간은 비단 과도한 알코올만이 원인일 수 없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으로 느닷없이 일어나 창문을 열어본 후 멍한 눈과 맹한 정신으로 담배 하나 태워 물고 한숨 깊이 뱉어내면 일순 밀려드는 눈물 나도록 그리운 날들. 하나하나 또렷한 기억들, 기록들, 기척들. 그 환장할 시간들.
떠나온 곳에 두고 온 마음이 이리 휘청 저리 휘청, 그러다 휘영청 밝은 달이 뿜어내는 의연함과 근엄함에 도취되어 불끈, 마음을 다잡았다면 좋겠지만 그게 절대로 그렇게 될 리 없고 그 밤의 달마저 유랑의 시절을 소환시켰으니 여태 날것으로 존재하는 과거는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경계를 희끄무레하게 만들며 안 그래도 어지러운 지금을 더욱이 진한 멀미로 이끌고 있다. 나의 시간은 오늘을 쫓지 못하고 있다.
과연 그리워 눈물 나는 대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더불어 쉬이 재회하기 어려운 상대를 품고 있다는 것은 복인가, 화인가?
어떤 이는 말했다. 그 어떤 이가 어떤 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간에 어떤 이는 말했다. 경험만큼 좋은 수업은 없다고, 다만 수업료가 좀 비싸다고. 사소하게나마 값을 치러본 나는 안다. 그리움이 없는 곳엔 설레는 기다림도 없다는 것을. 내력 없이 흘러간 세월, 흔적 없이 사라진 지난날, 하여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아닌 뜨거운 피로 토해내는 그리움은 이제 갓 잡아 올린 활어인 양 은빛 찬란한 비늘을 자랑한다는 것을. 그 생동이야말로 바닥을 치고 오를 때 발휘되는 생애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크게 흔들리며 깊게 어지러운 오늘의 발걸음, 그 향긋한 멀미가 여기 아닌 어딘가를 꿈꾸는 지속 가능한 열망으로 남는 한, 집도 절도 돈도 백도 없는, 볕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방구석에서 스멀거리며 돋아나는 눅눅하고 암울한 청춘일지라도, 웃음과 행복 대신 경쟁과 술수만이 난무하는 강퍅한 세상일지라도 날선 오기와 앙다문 뚝심으로 능히 견뎌볼 만할 것이다.
“개는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개가 될 수 있다”는 뼈있는 농담처럼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 한 성정에 힘입어 비인간으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청산하고 “저거, 저거! 사람 안 돼” 단언하던 선후배들의 확신에 비수를 꽂으며 꽃보다 아름답다는 참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나는 다시 떠날 것이다.
과거,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근데 그들이 누구냐고?
그 작은 새들, 집시 말이다. 누군가는 보헤미안Bohemian이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치고이너Zigeuner라 부르며 또 다른 누군가는 히따노Gitano라 부르기도 하며 그들 스스로는 롬Rom, 사람 혹은 순례자라 부르는.
비록 날개가 황금으로 변해 땅으로 내려와야 했으나 본래 새의 것이었던 태생적 영혼은 불변하는 성질을 지녔는지 지상의 삶,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바람이 부는 곳으로 스스로를 맡겨 끊임없이, 하염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여전히 자유의 이름으로 비행하는 자들. 그들의 방랑과 방외,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으며 금기와 편견을 넘어서는 용기와 자유의지는 너와 나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가슴속에 숨겨진 황홀한 로망에 다름 아닐 것이다.
존재의 투신 없이 무슨 구원이 있으랴! 그 로망,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심장 중앙부를 꿰뚫는 가장 강력한 비트로 화하여 나로 하여금 그토록 꿈꾸는 길 위의 삶에 재등장하게 할 촉매제로 작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다. 그 어떠한 회의도 두려움도 없이.
그리움이 계속되는 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