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여행기] 여행이란 익숙한 공간에서 나를 뜯어내 낯선 공간으로 밀어넣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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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여행기] 여행이란 익숙한 공간에서 나를 뜯어내 낯선 공간으로 밀어넣는 일

피비 16 4792
여행이란 익숙한 공간에서 나를 뜯어내 낯선 공간으로 밀어넣는 일,
어디서 잘 지, 무엇을 먹을 지, 어떤 옷을 입을지, 색다른 시선으로 고민하게 하는 일,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까봐 조마조마하지만 한편으론 반갑게 받아들이는 일,
갑작스런 풍경에 넋이 나가는 일, 낯섦을 무례함으로 오해하는 일,
부끄러운 나 자신을 유독 많이 만나게 되는 일, 2013년 4월 방콕에서.

장난감 같은 호텔 셔틀을 타고 아속역으로 출발했다. 수쿰빗의 교통 정체는 평일 낮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속역 다 와서 주위 차들이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함께 탑승한 외국인의 그냥 내려서 걸어가는 게 낫겠다는 투덜거림에,
우리 모두는 장난감 병정 같은 복장을 한 드라이버만 두고 뿔뿔이 흩어졌다.

아속역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웨스틴그랜드수쿰빗 호텔 1층에 위치한 맥도날드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국에는 없고 태국에만 있다는 "콘파이"를 주문해서 자리에 앉았다.

그저께, 저 햇살에 뜨겁게 데인 이후로 나는 오후 12시에서 2시 사이의 방콕의 쨍한 날씨에 대항하는 일은 가볍게 접었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휴식'이 제격이다.
부러 고생할 이유는 없다. 없다. 없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실제로 사서할 사람은 몇이나 있겠는가.

꽤 오래전 일이다.
라오스 씨판동에서 태국으로 넘어오기 전,
여행자의 신분에 걸맞게 어디든 찍고 와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참파삭이란 곳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어쩌다보니 저녁 늦은 시간에 떨어졌고,
사람들은 픽업트럭에서 하나 둘 내리기 시작하고,
결국 나와 기사 둘만 남게 되었다.

용감하기보다 무식했던 그 당시 나는 민폐 덩어리였다.

외국인 여자 손님이 미래의 여정을 본인의 처분에 오롯이 맡긴 채,
종점에 도달해서도 내리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씨판동에서 나를 구제해준 프렌치 남자애와는 달리,
오지랖도 시간의 여유도 없었던 기사는 황량한 벌판에 나만 세워두고 떠났다.
배낭을 메고 터덜터덜 걷고 있으니 한 선량한 마을 주민이 나를 동네 호텔 앞에 오토바이로 실어주었다.

8달러 짜리 방이었고 나는 비싸다고 방 구경을 거절했다.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 가지만,
그때는 신변의 안전보다 하루 10달러로 정해진 버짓을 맞추는 게 더 중요했다.
이미 점심값과 교통비로 수 달러를 소비한 상태였을 테다.

지금은 사라진 알뜰 배낭족의 끝물 세대로서 나는,
돈을 아끼면서 동시에 '자존감'을 지키기가 얼마나 힘든지 몸소 겪고 정면대결하는 중이었다.

호텔은 몇 개 있었지만 5달러 이하의 방은 없었다.

7달러짜리 호텔 카운터 앞에서 한숨을 폭 하고 내쉬니,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유들유들한 인상의 한 아저씨가 3달러 짜리 방이 있다며 나를 앞세웠다.

객실 문을 여니 침대 2개가 있는데, 조금 이상하다.

한 침대 옆에 작은 가방이 놓여 있고, 옷가지들이 침대 위에 부려져 있고 수건도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본인의 방을 셰어하자는 의미였고 본인이 4달러를 부담할 테니 내가 3달러를 내면 된다는 거였다.
나는 마치 하룻밤을 3달러에 제안 받은 것처럼 치욕감에 몸서리를 쳤고,
혼비백산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그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로 뛰어서 호텔에서 멀리 멀리 달아났지만,
뒤에서 몇명의 아저씨들의 비웃음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 했다.
순진한 처녀 만큼 희롱하기에 좋은 상대가 있을까.

낯선 세상의 무례함에 상처를 입고,
너덜너덜해진 심신을 좀 달래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5달러 이하의 방이 없었기 떄문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선, 12시간 이상 로컬 버스를 타고 라오스로 간 거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더욱이 가이드북 없이 낯선 곳에 호텔 예약도 하지 않은 채로 가다니,
저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를 앞에 앉혀 놓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한판 설교라도 하고 싶다.
라오스 아저씨든 어떤 아저씨든 저런 제안을 한다면,
호호호 웃으며 아저씨 팔뚝을 세게 때리며 근육에 점수를 매김과 동시에
상황 자체를 농담으로 능수능란하게 넘기면서 그의 체면도 함께 지켜주면 된다.
그러면 된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고 있다면, 식의 덧없는 조언일 뿐이겠지만 나는 얼굴을 붉혔을 과거의 내가 조금 안타깝다.

이제 그만 편안한 방으로 들어가 픽업트럭에서 쓴 먼지를 좀 씻어내면 좋겠는데,
이 아가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어린 남매의 도움으로 새로운 게스트하우스를 소개받았다.

화장품 냄새가 진동하는 집 안주인이 나를 아래 위로 훑으며 '3달러'만 주면 된다고 했다.
3달러란 말에 내 얼굴은 금새 환해졌다.
웬만하면 이제는 정착을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방을 살폈다.

근데 곧 문제가 발생했다.

그녀는 내게 방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까지 돼지나 소가 살았을 법한 헛간에 때로 찌든 매트리스 하나 놓은 공간을 보여주었다.
모름지기 방이라면 어떤 건물 안에 들어가 있어 천장과 벽이 맞물려 있어야 하는데,
그곳의 문은 낡은 판자 몇개를 덧대어 만들어졌고,
천장과 문 사이에는 창문 하나 내도 좋을 만큼 공간이 비어 있었다.

이곳에 자느니 조금 전 '치욕의 방'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게 낫겠다, 고 진심 생각했다.
적어도 그 방은 젊은 처자에겐 조금 모욕적일 순 있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는 않는 수준이지 않은가.

또 한번의 혼비백산 도망침이 있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 뒤로 속물에 앙칼진 여편네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그로부터 십년이 흘렀다.
내게 여행이란 더 이상 낯선 동네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밤새 기다리는 일,
내 한 몸 누일 곳을 찾아 골목 골목 헤매는 일,
다른 언어를 쓰는 여행자들과 허물없이 뺨을 맞대며 인사를 나누는 일,
현지인 집에서 함께 빨래를 개고 음식을 나누는 일이 아니다.

나는 호텔에서 제공해주는 셔틀을 타고,
아낌없이 시원한 공기를 퍼주는 맥도날드에 앉아,
한국에는 없고 태국에만 있다는 콘파이를 먹기 위해 이곳에 있다.

콘파이,
애플파이에 애플 대신 캔옥수수가 들어가 있는 게 콘파이다.

2013년 4월 방콕 여행에서 행한 가장 큰 모험은 바로 콘파이를 먹는 일이었다.



**맥도날드에서 여기까지 쓰고 일어났네요.ㅋ 라오에서 숙소 찾는 일이 마무리 되지 못했지만 뭐, 실시간 여행기의 묘미이겠거니 해두죠.ㅋ
16 Comments
호루스 2013.04.24 11:34  
다음 글이 무척 궁금해지네요.

피비님 글은 어떤 맛일까?

마치 먹어보지 못한 콘파이 맛을 아닐까 싶네요.
피비 2013.04.26 17:43  
기대하면 맛 없는 그런 맛이에요.ㅋㅋㅋ
곰돌이 2013.04.24 12:04  
태사랑엔,

필력 좋은 분들이 많은데...

그 중 한분이  피비님 인듯  ^^*


어찌 이리 글을 잘 쓰시는지^^


다음 실시간 여행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게 만듭니다^^;;





저도.  십년전의  저를 본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

얘야~`  ****** 와  ***** 주식은 얼릉 팔아버리고,

****,  ***** 을 사거라... ㅜㅜ
피비 2013.04.26 17:45  
곰돌이님~ **** 팔고 **** 사거라...ㅠㅠ

1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ㅠㅠ
고구마 2013.04.24 14:34  
곰돌이님~ 저도 동감!! 입니다. 백프로요.

십년전... 피비님의 여행공간이였던 그 라오스
먼지 터벅터벅했을 어두운길의 낮선 냄새마저도 글에서 묻어나올정도로, 사실감있으면서 또한 아련한 글이네요.

사실감과 아련함은 공존하기가 어려운데, 정말 절묘하십니다.
피비 2013.04.26 17:51  
고구마님도 주식...ㅋㅋㅋ

라오스 다시 가서 돈 지랄 하는 여행을 해보고 싶네요.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근데 저기가 참파삭인지 어딘지 아리송하다는 게 문제.ㅠㅠ
가이드북은 필수입니다.
저 당시 요왕님의 헬로태국 책을 들고 다녔었는데 말이져.ㅋ
하늘빛나그네 2013.04.25 01:54  
저 피비님 팬 할렵니다. ㅎㅎ
여행 자주 다니시고 글좀 많이 남겨...... 달라고 하면 좀 염치없겠죠? ㅎㅎ

올려주시는 글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피비 2013.04.26 17:51  
기록은 삶에 우선한다....를 앞으로 지킬 생각입니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에요.ㅠㅠ
본자언니 2013.04.25 08:43  
10년전에 저는 귀가 아주 얇은 여행객...
피비 2013.04.26 17:52  
ㅋㅋㅋ 초보 배낭일 땐 귀 얇은 건 말할 것도 없고요.ㅋㅋㅋ
세일러 2013.04.25 16:54  
사람을 빨려들게 하는 필력~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죠~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피비 2013.04.26 17:54  
저도 댓글 하나 하나 소중하다 생각하며 읽고 있어요.ㅋ
참새하루 2013.04.26 11:51  
피비님이 경험했을 추억들이 부럽습니다

젊었을때 피비님처럼 여행을 해보지 못한 저는
나이들어 배낭메고 젊은이들 배낭족 흉내를 내보았지만
역시 몸은 편안함을 추구하더군요

겉모습은 배낭족인데 안어울리는 장소에
안맞는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

부럽네요
피비님의 그 추억들은  돈을 주고도 살수 없답니다
피비 2013.04.26 18:01  
나이 들어 배낭 메고 여행을 하시는 점, 정말 존경스러워요~
나중된 사람이 먼저 된다는 말이 있듯,
저는 지금 배낭을 메네 벗네 과도기에 있지만,
꾸준히 배낭 메고 건강한 여행을 하시는 분들 보면 부끄러워요.ㅠㅠ

이젠 웬만하면 돈으로 번거로운 일은 피하고 싶은데, 이게 좋은 방향인 건지 감이 안 잡히네요.
나마스 2013.06.26 13:27  
몇달 지난 글이지만 글이 좋습니다. 필력있으시구요
피비 2013.09.25 15:39  
몇달 지난 댓글이지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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