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을 울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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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울린 시인!

필리핀 14 576

 

내가 형을 처음 만난 건 1981년 봄이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경희대학교 주최 고교생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 모처럼 서울에 왔다. 백일장이 끝나고 서울에 사는 고등학교 선배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대구행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경희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금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평론가이면서 모 대학교 교수로 계시는 박모 선배가 내 잠자리를 책임지기로 했는데, 자신도 형님 집에 얹혀사는 처지인지라 자취를 하고 있던 부산 출신 1년 후배에게 나를 인계했다.

졸지에 자신의 직속 후배도 아닌 난생 처음 보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을 반 강제로 떠맡게 된 그 경희대학교 3학년생은 황송하게도 나를 카페로 데려가서 맥주를 몇 병 사주더니 자신의 자취방으로 이끌었다. 엉겁결에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 그의 자취방은 사방 벽이 책으로 빼곡했다.

이듬해 5, 이병천, 하재봉, 박덕규, 안재찬, 남진우 등이 멤버였던 시운동동인의 4집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나는 그 책에 이륭이라는 필명으로 존재의 놀이연작을 발표한 이상백 형이 1년 전 내가 묵었던 자취방의 주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87년의 어느 봄날, 녹두서평이라는 무크지를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책에는 제주 4.3항쟁을 장편서사시로 담아낸 한라산이 실려 있었는데 그걸 읽고 불에 덴 듯한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를 쓴 이산하라는 인물이 왠지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라산을 읽고 느낀 감동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던 나는 전라도에서 중학교 국어교사를 하고 있던 안모 시인에게 전달하려고 복사를 해서 봉투에 넣고 주소까지 적은 다음 우체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아뿔싸, 그 봉투를 지하철 선반 위에 올려놓은 채 내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낯선 사내들에게 붙잡혀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198211, 월북한 오장환 시인의 시집 병든 서울을 읽었다는 이유로 군산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사 몇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들은 가족과 변호사의 접근이 불허된 채 불법 감금당한 상태에서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에 시달린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다. 시집 한 권이 어마어마한 용공사건으로 비화된 오송회 사건2007612,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의해 군사정권이 국가보안법을 남용해서 조작한 사건으로 판정되었다. 이후 피해자들은 재심을 신청했고 20081125일 광주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광웅 시인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92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내가 이산하의 한라산복사본을 전달하려고 했던 안모 시인은 이광웅 시인의 대학교 후배로, 오송회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던 바로 그 지역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한라산을 복사해서 넣은 봉투에는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이름과 주소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으니, 그게 만약 경찰의 손에 들어간다면 제2의 오송회 사건으로 비화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제2의 오송회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라산을 쓴 이산하 시인은 1987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나는 이산하가 이륭이고 이상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옥살이를 마치고 난 뒤 재야단체와 인권단체에서 사회운동을 계속하던 형은 2003한라산을 완결해서 한 권의 시집으로 펴냈다. 그 무렵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형을 자주 만나던 나는 형이 쓴 산사기행집 적멸보궁 가는 길의 한 대목을 보고 형을 부추겨서 양철북이라는 책을 쓰게 하고 내 손으로 편집을 해서 출간했다.

양철북은 내가 읽은 최고의 성장소설로 어린왕자데미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인데 기대만큼 많이 읽히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형을 볼 면목이 없어졌다. 그 뒤 내가 외국으로 떠돌고 거처마저 지방으로 옮긴 다음부터는 가끔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 형의 몸과 마음이 꽤 아픈 모양이다. 웬만해서는 엄살을 부리지 않는 형인데 페이스북에 “40대 중반 서교동 골목길의 교통사고와 50대 초반 합정동 골목길의 백색테러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반품된 후 모든 게 허망해지고 오랫동안 애써 부정하고 망각했던 고문의 악몽마저 되살아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간다.”라고 쓴 걸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랜 세월 형을 아프게 해왔던 세력들이 생각난다. 형이 한라산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담당 검사였던 황모 씨(박근혜 정권의 마지막 국무총리)는 형에게 평생 콩밥을 먹이겠다.”고 했단다. !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저들의 무덤에 침이라도 뱉어줄 거 아닙니까!

얼마 전 형의 시집 악의 평범성이 나왔다. 부디 이 책은 많이 읽히기를 바라면서, 형의 지난했던 생의 과정이 스며있는 시 한 편을 가만히 읊어본다.

 

모든 게 그렇겠지.

이제 패색이 짙은 낙엽처럼 다른 길은 없겠지.

홀로 핀다는 게 얼마나 속절없이 아픈 일인데

아름답기 전에는 아프고 아름다운 뒤에는 슬퍼지겠지.

그대 뒤에서 그대를 은은하게 물들이거나

세상 뒤에서 세상을 은은하게 물들이거나

이기지 않고 짐으로써 세계를 물들이는

그런 저녁노을 같은 것이겠지.

어차피 질 줄 알면서도 좀더 잘 지기 위해

잘 지기 위해 잘 써야지, 거듭 나를 치다가도

이 난공불락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어 혼자 중얼거리겠지.

, , 나킨온 헤븐스 도어……

, , 나킨온 헤븐스 도어……

 

모든 게 그렇겠지.

아직 다른 길이 없으니 왔던 길 계속 가야겠지.

케테 콜비츠 판화 같은 세상도 여전하고

들판에 하얀 목화꽃이 팡팡 터지는 꿈도 사라지고

이젠 너무 멀리 이송되어 돌아갈 곳도 잊어버리고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아무 소용도 없어지겠지.

어느날 내가 심해어처럼 베니스에 홀로 누워

마지막 별빛의 조문이 끝날 때마다

속눈썹 같은 물안개로 피어오르던 그대의 가슴에 묻혀

그대의 폐사지 같은 눈빛을 보며 다시 중얼거리겠지.

, , 나킨온 헤븐스 도어……

, , 나킨온 헤븐스 도어…… 

이산하, 베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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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omments
필리핀 2021.06.01 11:20  
<나무>는 노무현 대통령 1주기 추모식을 위해 쓰여진 시라고 합니다...
sarnia 2021.06.01 11:42  
https://thailove.net/bbs/board.php?bo_table=freetalk&wr_id=161140&sfl=wr_name%2C1&stx=sarnia&sop=and&spt=-25354&page=2

세상은 참 좁군요.
내가 저 분을 만난 건 2010 년인데, 그 모임에서 사실은 1980 년 대 후반 같은 조직에 있었다는 걸 서로 확인하게 되었지요. 저는 공개조직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예명)이 알려져 있었지만, 저 분은 언더에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라도 80 년대 당시 진보진영 오픈조직의 비사에 대해 좀 더 알아 볼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필리핀 2021.06.01 13:03  
그때 제가 두분의 만남을 주선했나요?
아님 ㄴㅁㅅㅌㅈ님이었던가요?
오래 되어서 가물가물하네요...
sarnia 2021.06.02 03:34  
모임은 부산 최여사가 주선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할 이야기가 많은 사이란 걸 알게 되었지요. 당시 그 단체에 언더라는 건 없었고 다만 문목사와 김근태 씨 계열에서 외부 논의구조를 운영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산하씨는 아마도 그걸 언더라고 표현한 것 같아요. 저나 정x주 민x두 최x, 이 네 명은 당시 사무실을 따로 쓰며 거의 모든 단위의 논의구조에 업저버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들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이산하 씨 이야기가 조금 의외이긴 했습니다.  기관지팀인 편집기획실장 이x복 씨가 나가고 나서 말지 편집장 하던 이x원 씨가 들어왔는데 편집위원들이 n 과 p 로 자리마저 갈라져 있던 걸 보고 힘들어했어요. 계열은 서로 달라도 개인적으론 다 친하게 지냈습니다. 긴 이야기는 그렇고,, 어쨌든 세상은 좁아요.
필리핀 2021.06.02 06:25  
아항! 최여사랑 산하형은 제가 소개해서 알게 되었으니 그게 그거네요.^^
두분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최여사랑 나눈 기억이 나요.ㅎㅎ
비육지탄 2021.06.01 12:01  
문외한의 눈에도 마지막 도끼문장은 참 인상적이네요...
필리핀 2021.06.01 13:04  
노통의 삶을 생각하면
너무나 절묘해요...ㅠㅠ
향고을 2021.06.01 15:24  
하여간 사르니아님과 필리핀님은 태사랑 쌍두마차,
필리핀 2021.06.02 06:27  
왠지 댓글을 쓰다가 만 거 같네요? ㅎㅎ
향고을 2021.06.02 06:50  
필리핀님 한테 혼날까봐 밑에 두줄 지웠어요,
어쩐지 필리핀님은 형같다는 생각이 들어서,ㅎㅎ
필리핀 2021.06.02 07:45  
놓친 버스는 안타깝고
떠난 애인은 그리웁고
지운 댓글은 궁금하다? ㅎ
향고을 2021.06.02 08:48  
궁금증은 풀고 가야죠,
유흥(명월이)
필리핀님은 명월일 찿을것 같고,
사르니아님은 옥경일 찿을것 같고,
궁금증은 풀렸으니 혼내지는 마세요,
근데 억맨이형은 영등포 가셨는가,
혹시 막걸리 한병들고 삼각산,ㅎㅎ
필리핀님 글에 댓글 많이 달아주던 억맨이형인데,
화니텐 2021.06.03 16:38  
와우...근현대사의 한 장면을 태사랑에서 읽는군요
필력도 인맥도 대단하시네요
필리핀 2021.06.04 10:24  
어두운 시절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 한두 개쯤은 있겠지요.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는데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모골이 송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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